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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 <메디치미디어> 편집주간
 강원국 <메디치미디어>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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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의 퇴진과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신군부는 광주에 공수부대까지 투입해 많은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언론장악으로 외지에서는 광주의 일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즈음,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광주에서 자행되는 신군부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교사들의 설득과 군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바로 전주신흥고등학교 이야기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전남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고등학생이 일어선 곳은 신흥고가 유일했다.

시위가 계획되어 있던 1980년 5월 27일 아침, 신흥고 앞에는 탱크 2대와 군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자칫 전주가 제2의 광주가 되어,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신흥고 교사들의 설득으로 학생과 군이 충돌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고, 주모자들이 처벌받는 수준으로 일단락됐다.

신흥고는 시위 30주년이었던 지난 2010년, 이 시위를 '신흥 5.27 민주화 운동'이라고 명명하고 시위 주동자의 징계를 무효로 했다. 또한 신흥고는 당시 징계를 받았던 졸업생들을 학교 차원의 '민주화 유공자'로 대우하기로 했다.

그 날 상황을 자세히 듣고자, 당시 신흥고 3학년에 재학한 강원국 <메디치미디어> 편집주간을 지난 6일 서울시 동작구 사당역 근처에서 만났다. 그에게서 이른바 5.27 사건을 내막을 들어보았다. 다음은 강 편집주간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학교 앞에 들이닥친 탱크와 군인들

당시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S자를 그리며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
▲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모습 당시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S자를 그리며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
ⓒ 전주신흥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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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분이 5월이 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릴 것 같아요. 강 전 비서관은 1980년에 고3이었지만 전주에서 간접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얘기 좀 해주세요.
"전주에 소재한 신흥고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미 광주는 전남 도청이 진압되었을 때죠. 저희는 5월 27일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그걸 알려야 하지 않느냐'고 봉기했습니다. 광주·전남을 제외하고,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이었죠. 시민들에게 광주의 학살을 알리자는 게 5월 27일의 목적이었어요.

하루 전날 모의를 했죠. 저는 1반 실장이어서 일종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죠. 우선 제가 방송실을 점거해 방송으로 학생들에게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하고, 저희 반이 선봉에 서기로 했어요. 전날 교단 밑에 유인물과 펼침막을 갔다 놓아 뒀어요.

실제 1반이 가장 앞장 서서 정문을 돌파하려고 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계엄 상황이라서 탱크 2대가 교문 앞에 와있었죠. 하늘엔 사진 찍으려고 헬기 2대가 있었어요. 전부 발포를 할 수 있을 때였어요. 이미 광주에선 (발포) 했죠.

전주 신흥고 앞에 전주천이 흐르는데 소식을 듣고 학부형들이 전주천 건너편에 오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오셨죠. 때문에 (군인들이) 천을 건너진 못했어요. 만약 당시에 전주천이 뚫렸다면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 분명 비밀리에 모의했을 텐데 학교 앞에 탱크가 와 있다는 건 새어 나갔다는 증거네요.
"애초에는 전주 시내 몇몇 고등학교가 함께 봉기하는 것으로 계획이 돼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정보가 유출되었을 겁니다. 우리 학교도 당일 나가 보니 선생님들이 일찍 출근하셔서 교실을 지키고 계셨지요. 우리에게 일절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고요. 다른 학교는 선생님들에게 장악돼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 당시 방송에선 광주 보도를 아예 안 했고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을 때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신흥고가 미션 스쿨이에요. KSCF라고 기독학생 연맹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상당히 진보적인 단체였죠. 당시 신흥고 학생 중에 시위를 주동했던 이우봉, 허천일 등의 친구들에게 그 단체를 주도적으로 이끌던 목사님이 말씀을 많이 하셨죠. 의식화 교육은 아니었고, 광주의 참상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당시 광주 전남에서 유학 온 친구들이 많았어요. 전주고등학교 시험 보려고 왔다가 떨어져서 신흥고 온 친구들이 많았죠. 봉쇄되어서 (광주에)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가족이나 친척들을 통해 전화로 연락을 받았죠."

- 선생님들이 막았다고 들었어요. 물론 학생들을 다치지 않길 바래서겠지만 평소 가르침과 달라서 원망을 했을 것 같아요.
"신흥고에는 깨어있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수업시간에도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니까요. 선생님들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잖아요. 학생들 장래를 위해 막으셨죠.

정양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수업시간에 정부 비판을 많이 하셨어요. 저희 아버지도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그분이 아버지께 저를 빨리 피신 시키라고 전화하셨어요. 그래서 그 길로 서울에 가서 두 달 정도 잘 놀았어요(웃음)."

돈가스 사주시며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던 아버지

강원국 <메디치미디어>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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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이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고3 아들이 데모했을 때 좋아하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혼나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아버지는 전주천 건너에 계시다가 저를 보고 마치 민주투사 대하듯이 해주셨어요. 돈가스집에 가서 돈가스를 사주시고 그 길로 서울 차표 사서 보내시며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 수습은 어떻게 했어요?
"정문을 향해 돌진했어요. 가다 보니 제가 맨 앞줄에 서 있는 거예요. 정말 무서웠죠. 아마 그때 정문을 돌파하려고 했다면 사상자가 많이 생겼을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대열을 운동장으로 돌렸어요. 그래서 스크럼 짜고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았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하다가 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각자 돌아가며 시국을 규탄하는 구호나 웅변을 외쳤죠.

그것을 몇 시간 하니 저쪽에서 타협안을 제시한 게 '이 정도에서 끝내면 문제 안 삼겠다'고 해서 오후 늦게 명찰과 배지를 다 떼고 일렬로 서서 나갔죠. 좌우로 경찰과 군인들이 서 있고 해산했죠. 그 후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광주 전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고등학교가 쉰 건 신흥고가 유일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주동자들은 잡혀가서 형도 살았어요."

- 징계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이강희, 이우봉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나머지는 무기정학 7명, 유기정학 17명이었습니다(강원국도 유기정학을 당했다-편집자 주)."

- 35년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때요?
"여전히 자랑스럽죠.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1980년에 아빠는 뭐 하고 있었어?'라고 아들이 물어볼 때, 할 말이 없잖아요. 저는 평생 가장 잘한 일로 생각하죠. 물론 제가 의식이 있어서 한 게 아니라 철없이 한 것이지만 잘했죠.

참여정부 말기에 노무현 대통령님과 비서관 몇 명이 점심을 먹는데, 어쩌다 감방 얘기가 나왔어요. 대통령께서 '여기 전부 감방 갔다 왔죠?'라고 물으셨죠, 둘러보니 저만 빼고 동석한 비서관 모두 감방 경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고 '저는 안 갔다 왔습니다'라고 해서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어요. 근데 윤태영 부속실장이 '강 비서관은 고등학교 때 데모를 했습니다'라고 변호(?)를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때 (유기) 정학 맞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지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영광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영광의 언론, 그리고 방송이야기'(http://blog.daum.net/lightsoriikwang)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강원국, #전주신흥고등학교, #신흥 5.27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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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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